1983년 청량리 맘모스호텔에 동안의 20대 중반 대학생이 스위트룸을 이용하겠다고 찾아왔다. 일반 객실도 아닌 귀빈용 스위트룸을 장기간 이용하겠다는 이 당찬 대학생은 이곳에서 밤낮을 바꿔가며 하루 17시간씩 일에 몰두했다. 봄이 한참 무르익은 무렵 잠시 호텔밖으로 외출을 나왔을 때 그는 계절의 변화마저 눈치채지 못해 두꺼운 겨울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21년동안 의료정보 소프트웨어회사의 한길을 걸어온 `비트컴퓨터`를 창업한 조현정 사장(46)은 이처럼 호텔방 한켠에서 한국 벤처의 역사를 만들었다. `대학생 벤처 1호` 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조 사장은 인하대학교 3학년 재학 시절 직원 두 명과 함께 450만원 자본금으로 출발한 비트컴퓨터를 자본금 62억원, 연매출 200억원대의 회사로 성장시켰다.
#창업과 수성
병ㆍ의원 관리 프로그램 개발업체로 출발한 비트컴퓨터는 창업 1년 만에 의료관리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최고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현재까지 비트컴퓨터가 개발한 의료정보 시스템은 무려 1백50여 종에 달한다. 대표적인 기술로는 OCS(의사처방 전달 시스템)를 들 수 있다. 이 기술은 진료의사의 각종 처방이 각 진료 부서로 자동 전달되는 시스템이다. 이외에도 병원의 원무와 일반행정관리를 자동화해주는 시스템 (HIS), 의료영상을 저장하고 전송하는 시스템(PACS) 등이 있다. 최근에는 EMR(전자의무기록시스템) 시장에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는 말은 비트컴퓨터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창업 이후 승승장구하며 성장하던 비트컴퓨터는 최근 2∼3년 동안 큰 시련을 겪었다. 지난 2001년 매출 195억원에 15억원의 순손실, 2002년에는 매출 212억원에 4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하는 등 2년 연속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에도 매출 198억에 영업손실을 기록했으나 삼성동 본사건물 매각으로 25억원의 순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경쟁력이 없는 시장에서는 좀처럼 승부를 걸지 않는 조 사장의 경영 스타일에 비춰볼 때 최근 경영실적이 부진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99년경 벤처붐으로 자금조달이 용이해진 신생기업들이 의료정보 시장에 많이 진입했습니다. 이들 신생기업들이 제품을덤핑판매함에 따라 시장질서가 교란됐죠. 그 때문에 저희가 영업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비트컴퓨터는 그러나 올 1분기에는 지난해 매출에 비해 7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다. 올해 매출 목표도 340억원으로 크게 상향할 만큼 시장 상황을 낙관하고 있다. 의료법 개정안의 시행으로 의료정보시장 규모가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그동안 EMR 개발에 공을 들인 탓에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일본, 태국, 말레이시아 등 해외시장 진출도 순조롭다는 것이 조 사장의 전언이다.
#경쟁력
경남 진해 출신인 조 사장의 학창시절은 불우했다. 그의 나이 여덟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어 중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서울로 상경한 그는 충무로에서 전자제품 수리공 생활을 하면서 손재주를 발휘했다. 그러나 보다 좋은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인하대학교에 입학했다.
조 사장이 내세울 수 있는 경쟁력은 무엇일까.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머리도 갖지 못했고, 부잣집 아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직 남다른 것 한 가지는 시간을 잘 관리한 것입니다. 시간에서의 경쟁력만이 유일한 나의 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남들과 달리 생각나는 대로 다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가 창업 당시 17시간씩 일에 몰두하기 위해 값싼 변두리 사무실을 마다하고 다소 파격적인 공간인 호텔을 이용한 것도 어찌 보면 ‘시간싸움에서는 질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기 때문으로 이해됐다.
#작은 거인
조 사장은 나름대로 독특한 `나눔`의 철학을 갖고 있다. “돈을 벌어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저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벤처산업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플러스 섬 이론이 적용되는 영역이니까요.” 20억원을 들여 조현정 장학재단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10년 이상 수익성이 별로 없는 `비트교육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교육센터를 운영하는 방식에도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다. 처음부터 일정한 수준에 이른 사람만 받아들인다. 6개월간 맹훈련을 거치는 동안 각자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해야 수료할 수 있다. 그같은 성과들은 고스란히 `비트 프로젝트`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온다. 이렇게 배출된 인원만 해도 6777명에 이른다. 이들은 `조현정 사단`을 이뤄 벤처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시련을 마주할수록 강해지는 남자, 그런 조 사장에게 한국 벤처업계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머니투데이 박응식 기자 ntc21@moneytoday.co.kr
정선구 기자 (joins.com)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서울 충무로에서 전파사 기술자 생활을 했던 그가 생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술력 때문이었다. “겸손 떤다며 주저하지 말고 ‘나의 좋은 기술을 적극 활용해 달라’고 떠들어야 한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다.
조현정 사장은 부농(富農)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여섯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말고 전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일류 기술자가 된 계기가 됐다. 유난히 손재주가 좋아 무엇이든 척척 고쳤다. 딱지치기 하는 또래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71년 서울로 올라와서는 충무로 전파사에서 일했다. 이곳에서 그는 ‘업자 수리 전문가’가 됐다. 일반 기술자가 고치다 망가뜨린 것을 다시 완벽하게 고쳐주는 일이었다. 그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꼬마 기술자’. “기술자가 꿈이었는데, 10대 초반에 이미 유능한 기술자가 돼 버렸죠. 그래서 꿈을 업그레이드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는 검정고시를 거쳐 용문고에 입학했다. 고교 시절에도 그의 기술력은 숨어 있지 않았다. 학교시설 수리는 그의 몫이었다. 부품 하나 고치는 데 3000원씩 돈도 받았다. “학생이라기보다 기술자였어요. 수리비로 받은 돈은 기술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죠.”
인하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해서도 돈벌이는 계속됐다. 꼬마 기술자로 알려진 그의 명성을 듣고 대학에서 고장난 방사능 측정기 수리를 맡겼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려운 작업처럼 보였다.
하지만 회로를 하나씩 들여다보니 의외로 간단한 고장이었다. 콘덴서 하나가 문제였다. 갈아끼운 콘덴서 값은 단돈 100원이었다. 학교에선 난리가 났다. 당장 그에게 교수 방보다 더 큰 별도의 방이 제공됐다. 학교의 모든 제품 수리를 도맡았다. 학교에서 연간 450만원의 돈도 받았다. 당시 등록금이 학기당 60만원 할 때였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학교에는 나가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받은 돈으로 회사를 차렸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은 서울 맘모스호텔 스위트룸으로 잡았다. 방값이 매우 비쌌지만 냉난방이 잘돼 하루 18시간 근무가 가능하고 잠도 잘 수 있어 일반 사무실보다 유리했다.
호텔에서 사업하다 보니 소프트웨어를 사러 오는 병원 관계자들이 계약을 꺼리기도 했다. 호텔 방을 쓰고 있으니 돈 떼먹고 도망가는 사람으로 보기 일쑤였다. 그가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우수성을 안 병원들이 늘어나면서 이 같은 인식은 점차 없어졌다. 매달 진료환자들의 보험 청구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정리하던 병원 관계자들은 그 복잡한 업무를 소프트웨어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것에 놀라기 시작했다.
사업이 잘돼 가자 86년에는 회사를 옮기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정보기술(IT) 회사들은 청계천, 여의도 등에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테헤란로를 선택했다. 주변에는 빌딩이 별로 없었고 비닐하우스. 폐차장 등이 즐비했지만 마침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고, 도로는 왕복 10차선으로 넓혀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 미래의 신사업군이 들어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후 수천개의 벤처가 몰린 테헤란 밸리 시대를 그가 연 셈이 됐다.
그는 후배들에게 말한다. “요즘은 선배가 100을 노력할 때 200을 해야 할 너희는 50도 안 한다. 실력을 키우지 않고 한탕 하려는 ‘로또세대’다.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