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면장집 둘째 아들
내 고향은 경남 김해군 한림면이라는 시골이다. 2002년 대홍수때 잘 알려진 이 곳은 어렸을 때 홍수만 나면 들 건너 아랫마을에 있는 학교에 등교를 못할 뿐만 아니라 외부와 교통이 두절되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자유당시절이던 당시 투표에 의하여 면장(00년-00년)과 면위원장(00년-00년)을 지내셨다. 할아버지는 한약방을 하셨으며, 나는 누나 넷과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비행기 플로펠러까지 만드는 알루미늄공장을 운영하시다가 해방이되자 쫓기 듯이 전 가족이 함께 귀국하셨다.
사회 활동이 많으신 아버지의 노력으로 정부지원과 개인 재산을 더해 안명초등학교가 세워지고, 선생님이 전근 가시거나 부임해오시면 우리 집에서 모든 선생님을 모셔 놓고 만찬을 하기도 했다. 세 살 위 인 형은 3학기 동안이나 전교회장을 하고, 본인은 1학년 겨울 방학까지도 한글조차 모르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를 떠나기 전인 3학년까지 우등상(아버지의 압력이 아닌 배려인 듯함 – 6살 때 돌아가셨음)을 받기도 했다. 면 사람들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지금은 재 건축되었음) 이 학교의 벽돌 하나 하나가 조면장의 피땀이라고 면에서는 말을 한다.
집의 대지가 2000평정도 되는 큰 규모의 집이었다. 넓은 마당은 동네 아이들 운동장이었으며, 가을에는 마당이 작은 동네사람들은 타작을 하는 곳이었다. 가을철 야밤에는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동네청년 들이 참새몰이를 해서 잡은 참새로 별미를 맛보고, 집 울타리 안에 있는 텃밭에서 동네사람들이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의 채소를 추수를 해서 지하 창고에 두고 겨울 내내 온 마을 사람의 요긴한 간식거리로 충당하기도 했다. 또 동네에서 유일하게 라디오가 있는 집이었기에 저녁만 되면 많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그때부터 덕을 쌓아 가는 것을 익혀왔는지 모르겠다.
세 번이나 숨이 끊어졌다. 하도 약하게 태어났기에, 숨이 세 번이나 끊어 져 매번 죽은 줄만 알고 어머니가 통곡을 하다보면, 나중에 깨어나는 병약한 아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살아나는 특이한 아이였다. 그런 덕택에 좋은 약을 많이 받아먹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내는 요인이 된 듯 싶다. 2002.10.15
83일간의 검정고시 준비
73년 초
나이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을 시기였지만, 기술자들이 수리하다가 오히려 망가트린 고급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는 업자수리전문 회사에서 2년 반의 훈련을 받은 경력자로서 무엇이든 고장난 것들을 거뜬히 고쳐내는 일류 기술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름대로 다소의 성취감도 있었지만,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서글픔과 공부해서 대학가야겠다는 욕구가 생겼으며, 중학교를 떠날 때 2학년 한달 동안 담임 이셨던 정동철 선생님의 여러 말씀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어 고입검정고시를 준비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다니는 회사에서 그 해 동작동 국립묘지 앰프설치공사를 수주하였기에 현충일 전날까지 설치를 마치고, 6월 6일부터 8월 28일과 29일에 있는 시험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평소 월급은 3천원이었지만, 퇴직금조로 받은 만오천원으로는 학원비도 되지 않았으며, 검정고시 준비를 위해 누구나 가는 수도학원에는 3개월 짜리 짧은 종합반 자체도 없었다. 지금은 상권이 달라졌지만, 청계천 7가의 헌책방에서 헌책들을 구입하여 골방에서 83일간의 처절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에 살고 있던 전세 15만원짜리 집은 어머니의 바느질가게가 딸려 있었다 구멍난 블록으로 지어진 슬라브 형의 집은 단열처리가 전혀 되지 않아서인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더웠다. 그런 집에서 선풍기도 없이 무더운 6,7,8월에 공부를 하게 되었다.
열과 땀으로 인하여 엉덩이는 종기가 나서 짓 물이 나기에 베개를 사타구니에 끼워서 엉덩이를 공중에 띄워 놓고, 밥상을 책상으로 삼고, 삼베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를 한 것이다. 삼베 홑이불은 복사열이라도 막아주는 효과가 있어서인지 다소 시원하기는 했으나, 세수할 때에는 머리카락이 숱하게 빠지는 영양실조 상태이기도 했다.
결국 이 고입검정고시에 합격을 했다.
검정고시 시험의 규정에 의하면 타지역에서 몇 과목이라도 과목합격을 하게 되면 또 다른 지역에서 그 과목을 면제받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는 전국에서 동시에 시험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따로 시험이 있었기에 서울시험 한 달 전에 수원에서의 경기도 시험을 응시하려 했다.
그러나 2박 3일간의 여비가 없어서 결국 그 시험을 포기고 말았다. 그 당시 서글픈 생각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당시 10대 가수였던 장님가수 이용복씨의 히트곡인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가 더욱 자신의 처지를 처절하게 만들었으며, 죽고싶은 심정으로 이불을 뒤집어 쓰고 혀를 깨물어 보기도 했다. 심리적으로 가장 민감했던 사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잣집 아들이 불과 몇 년만에 부잣집 아들에서 가난뱅이로 몰락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대한 원망을 키워 탈선을 하지 않은 점을 큰 다행으로 생각한다. 2002.10.24
나이 30에 얼굴 책임진다.
한자시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 당시 삼성문화재단에서 만든 500원짜리 포켓용 단행본 중에서 아브라함 링컨과 벤자민 플랭클린의 자서전을 읽게 되었다. 링컨의 말씀 중에서 `40대 얼굴 책임론’을 의미 있게 이해를 했다.
`나는 30세에 얼굴을 책임지겠다’고 자기와의 약속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전문적인 실력과 도덕심을 키워서 책임을 지는 얼굴을 만들어서, 플랭클린 자서전의 제목처럼 ‘후회 없는 생애’를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하게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먼저 분석했다..과외나 학원조차 다닐 수 없는 가정형편이었지만, 중학교도 못 다니면서 익힌 전자분야의 기술을 제대로 키우기 위하여, 지명도 있는 대학의 전자공학과를 필수로 입학해야 된다는 목표를 정확하게 세웠다. 최근에 와서야 고교동창들이 당시 그렇게 어려웠는지를 몰랐다고 할 만큼 밝은 얼굴을 가지려 노력했으며, 내성적이었던 성격은 사회진출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바꾸고, 친구들의 유혹은 있었지만 어른들이 못하게 하는 담배조차 멀리하는 도덕심을 키워 가는 것이 일차적인 방법들 이였다.
이런 목표는 대학을 다니던, 군에 있던, 사회생활을 하던, 선생님이나 교수님을 대하던, 고객을 대하던 항상 강력하고 좋은 인상을 남기는데 노력을 했다.
1989년 1월 11일 미국의 월스트리트지에서 한 페이지에 걸쳐 ‘the Rising Star’라는 평가를 받은 계기로 그토록 고민했던 30세에 얼굴을 책임지려 했던 것을 달성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때가 31.4세였다. 일본의 NHK뉴스(88년), TV tokyo(89년), 대한뉴스(87년), 국내의 여러 언론에서 84년부터 지속적으로 다뤄진 여러 기사내용들을 통하여 전문가로서의 충분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고무된 생각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새로운 40의 준비를 위해서…
고등학교때 좌우명을 先優後樂(先憂後樂과는 다른 뜻임)으로 정했다. ‘우선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나중에 즐기겠다.’는 뜻과 ‘먼저 뛰어나면 기쁨도 따르게 되어 있다.’라는 의미로 본인이 만든 문장이다. 경주마가 앞만 보고 뛰게 하기 위하여 눈에다가 옆가리게를 하듯이 보다 알찬 30대를 위하여, 주변의 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목표만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요즈음의 젊은 청소년들은 마치 지금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생각하듯이 속단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2002.10.15군대는 가야한다.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는 대학교 2학년 또는 삼수생 일 때 받게된다. 나는 고등학교를 한해 늦게 들어가고, 대학입학은 첫해 실패를 하여 재수를 하게 되어, 고등학교 졸업자 학력으로 77년 신체검사를 받게 되었다. 신체검사에는 학력이 기준이 되어 체급판정을 하게되므로 고졸학력이면서 한쪽 귀가 들리지 않으면 면제가 되는 것이다.
이를 알면서 군대는 가야한다는 것이 초등학교의 ‘바른생활’ 책에서 배웠듯이 국민의 의무이자 도덕심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병무청 신체검사장이 제대로 된 시설로 상설화 되어 있어서 체급을 정밀하게 판정한다. 신체적인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못 판정을 받는 경우도 없으며, 요령을 피워 면제받을 수도 없도록 되어져 있다. 심지어 모든 처리과정이 컴퓨터로 처리되고 집계가 되기 때문에 아주 정확해 졌다.
그러나, 7, 80년대까지만 해도 신체검사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임시로 만들어진 야외 신체검사장에서 검사를 했었다. 10여명씩 조를 짜서 안과담당 앞에서 현역병들에게 몇 차례 기합과 함께 한쪽 눈을 가린 대강의 시력검사를 한 후에 군의관 앞에서 “눈이 이상이 있는 사람 손들어!“, 손을 든 사람만 자세히 검사를 하고 옆으로 옮기면, 이비인후과담당 현역병이 몇 번의 기합을 주고서는 ”귀, 목, 코에 이상이 있는 사람 손들어!“, 손을 드는 사람에 한하여 군의관이 자세히 검사를 한 후에 판정을 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손을 들지 않으면 정상인으로 처리되어 현역판정을 받게 된다.
손을 들지 않았다. 고향 친구들이 떠밀기도 했지만 결코 손을 들지 않았다. 미래에 책임질 얼굴을 위해서…
군입대 통지서를 받고 1학년 1학기를 마친 후 78년 논산훈련소 입대를 위해 울산공설운 동장에 집결했다..여기에서는 여러 군의관들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신체검사를 또 하게 되어, 나 역시 확대경 검사를 실시한 결과 왼쪽의 고막은 전체가 없고, 한 쪽은 찢어져 있는 것이 발견됐고 재검명령을 받게되었다. 결국 부산통합병원에서 정밀검사를 거쳐서 방위병으로 판정을 받게 되었다. 이 때는 대학생이기에 판정기준이 높아져서 방위로 판정이 된 것이다. 입대할 것을 믿고 2학기 등록금을 마련 해 두지 못하여 연이어 복학을 못하고, 다음 해인 79년에 복학을 했다. 현역이 아닌 방위로는 가기 싫어져 갈등을 하다가 3학년을 마친 82년 2월에 입대를 하여 14개월 동안의 군부대에서 경계병으로 근무를 마쳤다.
한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상대의 말을 전체 알아듣지 못하지만 대강의 이해를 하고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은 앞뒤를 생각하면 몇 마디 놓쳐도 대화가 되지만 우리말이 아닌 영어는 정말 힘들게 한다.
지도자가 되려면 기본적인 의무를 다해야 한다. 세금, 가정, 이 나라 미래를 위한 자녀교육, 사회봉사, 간단한 교통질서까지도 지켜야 한다. 2002.10.15
월급 받는 대학생
78년 1학기를 마친 후에 군에 갔다가 귀가 나빠서 귀가조치를 받고 나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2학기 복학을 위한 등록금은 준비되지 않았으며 또한 언제 입대명령을 받게 될지도 불명확했다.
1학년 교양과목 중에서 공업화학과목을 가르치고, 교무부처장님으로 계신 원영무교수 (나중에 인하대학교의 총장이 되심)를 찾아가게 되었다. 학교의 보직교수님이면 어느 정도의 재량권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즈음은 그렇지 않지만 7,80년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의 상징탑이나 큰 건물에 붙어있는 시계들은 대부분 시간이 맞지를 않았다. 전기 모터를 이용하는 아날로그방식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한국전력에서 제공되는 전기는 전압과 주파수 변동이 심하여 시간이 맞지를 않았다. 학교에 있는 시계탑도 역시 매번 틀린 상태였다. “가만히 있으면 하루에 두 번이라도 정확하지” 하는 정도였다. 교수님께 이 시계를 고쳐 보겠다고 제안을 하며, 그동안의 성장과정을 설명드릴 기회가 되었다. 당연히 시계의 수리를 허락받았다. 그리고 시계의 외형은 기존의 아날로그로 두되, 회로는 디지털로 설계해 정확한 시계로 바꾸어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응용물리학과에 있는 방사능측정기를 고쳐보라고 했다.
교육차관으로 들여다 놓기는 했으나 몇 해째 고장이라는 것이다. 처음 다뤄 본 기종이긴 했지만 마침 회로도가 있기에 원리분석하고서 진단을 한 후에 콘덴서부품 하나를 교환하여 고쳐 냈다.
그 사실은 바로 학교내에 소문이 났으며, 당시 공과대학장이셨던 민수홍교수의 동서인 서울대학교 권이혁총장님댁의 칼라TV를 고쳐내기도 했다. 결국 원영무교수님은 교무부처장실을 나눠서 학교의 교육기자재를 수리를 해주면 등록금 전액과 월급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한 학기가 지난 후에는 대규모 강의실마다의 고가앰프를 직접조립해서 설치하는 등의 활동도 계속 늘어 갔다. 이런 생활은 1학년 2학기 복학하기 전 1년 전부터 3학년말 군에 입대할 때까지 3년 반 동안 계속 됐고, 군에 입대 할 때는 지금 인재대학교 의용공학과에 교수로 있는 조종만박사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한 학기 등록금이 40-50만원 할 때 년 간 소득은 500 여 만원 선이었다. 전액장학금, 학교월급, 연구수행비, 교수님들의 가전제품 수리비 등등이 주 수입원이었다.
교직원이 타는 통근버스를 동대문구 석관동에서 아주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러 통근 노선 중에서 이 버스는 석관동인 출발점이다 보니 첫 탑승자로서 뒷좌석에 않으면 잠이 들어버려 구로동쯤에서 타시는 교수님은 서서 가셨다. 3년 이상을 타고 다녀도 아무도 야단을 하지 않으셨지만, 이 점은 지금도 매우 죄송하게 기억되는 부분이다. “그 놈의 잠을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80년 신군부에 의하여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 석, 박사 과정의 대학원생들조차 출입이 통제될 때에도 학교의 연구직원의 신분증으로 출입이 자유로웠다. 짐도 챙기지 못한 체 기숙사에서 쫏겨난 친구들의 짐을 찾아 주는 일들이 있었다. 지금은 북한의 실정을 훤히 알고 있지만 북한 사람은 피부조차 붉다고 알고 있을 때, 학교를 점거한 31사단에서 교직원들에게 비디오와 영화를 보여 주었다. 못 먹고사는 북한이 아니라 서울보다 발전되어 보이는 평양시가지와 각종 시설을 봤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뒤로 북한이 발전하지 못했을 뿐인 것이지 당시로써는 우리보다는 앞서 있었던 현실을 봤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자료를 볼 수 있을 만큼 학생신분이 아니었다. 2002.10.15
이사장상을 받고 대학졸업
사립대학에서는 졸업식 날 최고의 영예는 단연 ‘이사장상’이다. 국립서울대학교는 대통령상을 주게된다.
1985년 졸업식을 앞두고 1월 초에 대학교에서 연락이 오기를, 그동안의 학교내의 활동상황을 고려하여 총장상을 주게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몇 일 후에는 지역신문인 경인일보의 취재요청에 의하여 인터뷰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한참 후인 2월초에 사회부기자답게 사전 연락도 없이 안양의 중앙병원(현,메트로병원)에서 프로그램 개발을 하고 있는 곳으로 조선일보의 김민배기자와 사진기자가 찾아왔다. 조선일보는 해마다는 아니지만, 그 해 전국의 대학졸업생들 중에서 화재의 인물을 간혹 취재를 하기도 하는데 85년 졸업시즌에 맞춰서 사회부 데스크에서 취재를 하기로 결정을 하고 인물추천을 받아 왔다고 한다.
IBM-PC가 81년에 처음 발표된 후로 보급되기 시작한 컴퓨터가 세계의 이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니, 해외에서 음악 콩크루대회에서 큰상을 받은 사람보다는 84년 12월호의 월간지 코리아리크루트에서 다뤄진 인하대 조현정이가 좋겠다고 결정을 하게되었다고 한다.
당시 총 12면 밖에 않되는 조선일보의 사회면에 크게 다뤄진 이 기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기사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후 학교에서 다시 연락이 오기를 품격을 최고로 높여서 이사장님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인일보는 중앙지에서 다뤄진 동일인물이라는 이유로 취재가 취소되었다.
졸업식장에서 상을 받지 말고 이사장님 실에서 따로 받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이 있었기에 졸업식장의 행사는 끝나고, 이사장님 실에서 리셉션을 곁들인 수여식이 따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조중훈이사장님, 박태원총장님(86년에 주례를 서주신 분), 조양호이사(현 대한항공회장), 학교 보직교수님들이 참석하여 축하를 해주셨다. 이 날 주요장면의 사진은 대한항공 사내보인 ‘창공’에 자세히 소개가 되었다고 함.
해마다 성적이 가장 우수한 이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이사장상의 수장자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학교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벤처가 강한 대학 인하대학교는 이 때 이미 벤처적인 사고로 최고상을 본인에게도 주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조중훈이사장께서 누굴 위해 살겠느냐고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얼떨결에 “모교발전에 기여하겠다”고 했더니 이사장님은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 줏대 없는 대답에 대한 후회를 하고서는 그 후에 대화를 할 때마다 보다 더 신중하도록 노력을 했다. 그러나, 말의 빚도 있고, 큰상을 받기도 해서, 모교발전을 위하여 정말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특히 95년 벤처협회를 만든 후에는 학교에 자주 찾아가서 세미나나 강의를 통하여 교수님들과 재학생들 상대로 70년대 이후에 계속 쳐져 가는 학교 선호도를 벤처로 승부하자고 선동(?)을 하고, ‘벤처가 강한 대학 인하대학교’라는 카피까지 정해주면서 설득을 했었다. 학교홍보 모델이 되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강의를 하고, 고3들을 위한 학교 PR강의도 하고, 97년 본인을 소재로 하여 국립영상제작소에서 만든 극장용 문화영화를 만들 때에도, 학교가 배경이 되게 하여 재학생 창업클럽에 대한 학교의 지원을 받아내기도 하고, 2002년 5월에는 뜻이 맞는 벤처동문(최성국회장, 황철주사장, 나종민사장)과 함께 보다 많은 후배 벤처기업가를 키워내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2300평 규모의 인하벤처창업관까지 건립을 해주었다.
그리고, 2002년 10월 중앙일보의 전국대학평가에서 전국 10위라는 종합평가에 대한 감개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2002.11.15호텔방에서 창업을 하다.
벤처라면 창고나 차고 아니면 허름한 사무실에서 어렵게 창업되는 것을 연상하는데, 비트는 비싼 호텔방을 임대해 창업을 한 것을 두고 매우 특이하게 여긴다. 1983년 창업을 결정하고서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경쟁력’이다. 충분한 자본과 일류대 출신, 배경 좋은 집안 등등이 바쳐준다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지만 본인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대신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 ‘시간’을 나의 유일한 경쟁력으로 삼고 효율성을 높여 승부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평소 학교 다니면서 벌어서 모아둔 450만원의 자본금으로는 사무실 보증금으로 겨우 250만원 정도만이 사용될 수 있었다. 나머지 200만원으로 청계천에서 조립된 애플PC 1대(본인이 평소 사용하던 애플 PC 1대 더 있었음)와 철제 중고 책상 3세트, 전화도 한 대는 필요했다. 팩스는 꿈도 꾸지 못했다. 250만원으로 한 층 규모가 20여 평쯤 되는 성북구 석관동 변두리 사무실의 보증금과 월세 25만원으로 잠시 있었으나, 교통보다는 하루에 일을 할 수 있는 작업환경이 심각했다. 경비인이 없는 빌딩이기에 건물주인이 저녁에 밤샘근무를 하지 못하게 하여 사무실을 열쇠를 잠그고 나와야 했으며, 심각한 것은 냉난방이었다. 에어컨을 살 여유도 없었지만, 요즈음의 모든 에어컨은 분리형과는 다르게 당시의 에어컨은 콤퓨레셔가 내장된 일체형이었기에 창문에 걸쳐 놓으면 무척 소리가 시끄러웠다. 겨울에는 난방을 위해 석유난로를 사용했으나, 켜고 끌 때 발생되는 엄청난 냄새 속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게 하였기에 대책이 필요했다.
서울에 올라와서 줄곧 동대문구 일대에 살았기에 자주 봐 왔던 청량리 맘모스호텔(지금은 청량리 롯데백화점으로 바뀌었음)이 떠올랐다. 1급 호텔이상이면 의무적으로 스위트룸을 갖추어야 하지만, 변두리 호텔이기에 그 스위트룸은 1년 내내 거의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를 한다면 밤새워 일을 할 수 있고, 냉난방과 숙소가 해결되며, 소프트웨어개발에 집중을 해도 주변을 신경 쓸 필요 없는 환경에서 적어도 하루에 17시간이상을 일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되었다. 호텔총지배인을 찾아가서 소프트웨어회사임을 설명하고 침대, 소파 모두 필요 없으며, 다른 투숙자들에게 피해 없이 조용히 근무할 테니, 장기 투숙자로 인정해서 빌려달라고 설득을 했다. 그 결과 20평이 넘는 넓은 스위트룸을 Deposit 600만원에 매월 60만원씩 투숙비를 주기로 하고 창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피스텔의 원조가 되다.
국내의 오피스텔은 1986년에 처음 분양되었으므로 오피스텔의 원조인 셈이다. 이 곳에서 일요일도 공휴일도 없이 짧지 않은 2년 반이나 생활을 하다가 86년에 테헤란로로 옮겼다. 정확히 말하면 오피스텔과는 분위기가 다르고, 2000년부터 소개되는 외국인 전용 임대 오피스텔(휴먼터치빌, 오퓨런스, 코아세스)와 비슷하다. 옮겨가기 직전에는 보증금 1200만원과 월 120만원의 투숙비를 내는 스위트룸 2개를 빌려 사용하기도 했다.
호텔방 창업은 상당한 역발상의 결과였다. 많은 이들은 투자도 없이 이익을 내려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그 당시의 역발상은 비용에 비하여 높은 효율성과 숙소까지 해결한 것이었다. 직원들과 함께 새벽 2시에 일을 마치고 바로 옆의 청량리 588(사창가) 입구에 있는 단골 식당에서 야참을 먹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본 후에 잠을 자는 재미도 있었다. . 2002.10.15대학생의 아르바이트도 세금내야 한다.
창업을 할 때는 대학생이었다.
비록 대학생이 호텔방에서 전화 받는 여직원 한 명과 대학 다니는 친동생과 함께 회사 같지 않은 규모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돈을 벌면 세금을 내야만 한다는 순수한 의무감으로 청량리 세무서에 사업자등록을 신청하기 위하여 찾아갔다.
지금은 사업자등록이 신고제이지만 당시만 해도 허가제에 가까웠다. 이때 세무공무원은 세 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하다고 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된 업종분류가 없으며, 대학생이라는 점과 호텔방의 창업이 문제가 되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보처리업이라는 업종코드는 88년부터 탄생이 되고, 벤처협회를 만든 후에 많은 대학교를 찾아다니면서 벤처창업 로드쇼에 가장 많은 강의를 했던 이유도 대학생창업에 대한 긍정론과 있었기 때문이다. 호텔방의 창업은 신고제에 가까운 지금에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세금을 내기 위한 의지로 세무 공무원을 설득하여 사업자 등록을 받게 되었다. 대학생의 아르바이트도 세금을 내야한다. 이것은 작은 교육이며, 자기 자신의 얼굴을 다듬어 가는 것과 같다. 나중의 개인기록관리에도 도움이 된다. 98년의 ‘MBC 성공시대’ 녹화 도중에 청량리세무서에서 연락이 왔다. “MBC에서 당시의 사업자등록증과 세금기록을 요청하는데 본인의 허락이 필요하다”했다는 것이다. 나는 일단 동의를 한 후에 MBC의 성공시대 담당 정성후PD에게 “뒷조사하느냐”고 물었더니, “83년 창업은 하되 세금을 않냈다면 인물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당시의 순수한 결정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알 수 있는 사례중의 하나이다.
당시의 순수한 결정이 얼마나 잘 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사례중의 하나이다.
당시 비트의 주 고객들은 작은 의원들이었다.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수입의 70% 이상이 일반환자이고, 나머지가 보험환자였기에 세금을 우려하여 소득노출을 꺼렸다. 지출이 많으면 소득이 많아 보이게 된다는 이유로 계산서를 받으려 하지 않은 원장님도 계셨다. 컴퓨터를 구입하면서 까지 보험청구를 할 정도이면 고소득임을 알리는 꼴이 된다 하여 세금계산서 받기를 꺼려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비트는 계산서를 철저히 발행하여, 83년 8월에 창업된 회사가 5개월만에 5천만원, 84년에는 1.2억원의 매출이 있었다.
은행대출이 되지 않았다. 업종분류는 어쩔 수 없이 서비스업으로 분류되었다. 이 전의 소프트웨어 개발은 하드웨어 판매회사 내의 개발부서로 존재했기 때문에 회사의 업종분류가 따로 필요가 없었으나, 소프트웨어 개발만 전문적으로 하겠다고 나선 회사로는 비트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1988년부터 새로 분류된 정보처리업은 제조업 수준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당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재화라는 이유로 서비스업으로 분류됐던 것이다. 나중에 테헤란로로 옮기기 위해 은행차입을 하러갔을 때 서비스업은 은행대출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0년대 중반까지 모든 은행은 국민들의 저축장려운동을 통해 모아진 자금을 제조나 수출업종에만 대출을 하게 하는 정부정책이 있었다. 2002.10.15
85년 조선일보 기사
85년만 하더라도 중앙일간지들의 신문면수가 3장으로 된 12면에 불과했다. 맨 뒤페이지는 TV방송프로안내와 스포츠기사로 채워져 있었으며, 글자 폰트는 지금보다 비교되지 않을 만큼 깨알같이 작은 사이즈였다.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다양한 컴퓨터 폰트에 의한 선명한 레이져프린트 출력에 의한 인쇄가 아닌 금속활자를 하나하나씩 조합해서 인쇄를 해 만드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읽을 면수가 12페이지에 불과했기에 열독률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았으므로, 아주 작은 기사조차 널리 알려질 수가 있었다. 이 때에 조선일보의 사회면에 1/3에 걸쳐 나를 소개한 기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 졸업식을 앞둔 2월초에 조선일보 사회부의 김민배기자와 사진기자가 사전의 연락도 없이 안양의 중앙병원(현, 메트로병원)에서 프로그램 개발을 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조선일보는 해마다는 아니지만, 그 해 전국의 대학졸업생들 중에서 화재의 인물을 간혹 취재를 하기도 하는데, 데스크에서 인물추천을 받아 왔다고 한다. IBM-PC가 81년에 처음 발표된 후에 컴퓨터가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니, 해외에서 음악 콩크루대회에서 큰상을 받은 사람보다는 84년 12월호의 월간지 코리아리크루트에서 소개된 인하대 조현정이가 좋겠다고 사회부 데스크에서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
취재에 따른 촌지가 없다.
보통 취재를 하면 기자에게 촌지를 주는 것이 예의 인줄 알고 있었는데, 이 날의 김기자는 나에게 언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 안양의 갈비집에서 먹은 식사 값과 팝 레스토랑에서 마신 술값을 모두 김기자가 부담했다. 그리고 좋은 신문사는 취재비가 따로 있으니, 앞으로 그런 신문과 잡지에만 나가야 한다고 충고까지 했다. 이로 인하여 구독이나, 광고를 전제로 하는 매체에는 인터뷰를 철저히 거부했다. ‘조현정이를 취재하면 촌지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취재기자를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까운 기자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사람은 촌지를 잘 주는 사람에게는 두 번 이상 취재하러 가는 것은 기자의 양심상 어려우며, 소문이 난 사람에게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큰 기자들이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기자가 원하고 독자가 원하는 기사거리가 많은 것을 훨씬 좋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사정도는 할 수 있다고 본다.
-조선일보 1985년 2월17일 일요일 신문기사 내용-
컴퓨터 예비 財閥 [대학생 社長]- 仁荷大 趙顯定군
소프트웨어 개발,작년 1억7천만원 벌어
주문쇄도 “올핸 16억 거뜬”
2백여개를 헤아리는 국내의 군소 컴퓨터관련 업체 중 유수의 대기업계열회사들을 제외하고 올해의 [유망기업]으로 꼽히고 있는 한 업체의 사장이 젊은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놀라워 할 것이다. 인하대 전자공학과4년 趙顯定씨(28).
[비트컴퓨터]라는 간판을 걸고 첨단의 두뇌산업에 뛰어든 지 불과 수개월만인 작년 한 해 동안에만 1억7천만원을 벌었다.
獨學연구 病院업무 電算化히트
의료보험환자의 수가계산, 진료카드, 수납업무 등 병원업무 전산화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 서울과 각 지방의 50여개 종합병원에 기술을 제공했고, 지금도 5천만원의 계약으로 병상 3백50여개인 안양 중앙병원의 전산화작업을 해주고 있다. 금년의 매출목표액은 16억원. 오로지 퍼스널컴퓨터에 젊음을 거고 부침(浮沈)이 무상한 소프트웨어업계에서 소규모 업체이긴 하지만 탄탄한 기반을 쌓아가고 있는 야망의 대학생 사장이다. 15명의 직원 중 경리 ,보조사원을 제외한 7명의 기술멤버도 모두 대학생 컴퓨터광(狂)들이다. 趙씨가 [모험산업]이라고 불리는 소프트웨어분야에 뛰어든 것은 83년 8월, 인하대전자공학과3학년에 다니다 군복무를 마친 후였다. 보증금 2백50만원에 월세25만원으로 얻은 서울성북구 석관동의 25평짜리 허름한 사무실에 틀어 박혀 하루 15~17시간씩 퍼스널 컴퓨터와 씨름을 했다. 그가 처음 개발해 낸 것은 친구 이모부인 장안이비인후원장 金정권씨(64)가 맡긴 병원업무전산화용 소프트웨어였다. 자신을 가진 趙씨는 이어 2만여명의 고객을 가지 월부서적전문 출판사로부터 전 고객카드를 전산화해 일-월별 입금액을 계산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달라는 주문을 얻어냈고, 3개월이 걸려 이 작업을 끝내면서 재능은 컴퓨터 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사무실엔 석영전자라는 국내 퍼스널컴퓨터 판매업체를 통해 주문이 쇄도했다. 석관등의 초라한 월세사무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집]이 됐다. 작년 초에 청량리 맘모스호텔 객실 하나를 빌려 옮긴 [회사]는 보증금 1천 2백만원, 월세 1백20만원으로 객실 2개로 확장되었으며, 그는 [컴퓨터에 미친 대학생]을 조건으로 사원들을 모집, 본격적인 소프트웨어 전문업체로 진출했다. 그 때부터 작년 말까지 주문을 받고 개발한 프로그램은 1백 40여 가지. 병원업무전산화외에도 1천 5백여 설문을 통해 짝을 찾는 컴퓨터 중매, 7천명의 종업원을 가진 중소기업의 입금관리 시스템, 사료성분배합 등 시장에 내놓기만 하면 돈이 굴러들어 오는 제품들이었다. 金덕성(24.명지대 전자과4년),金권철(24.인하대 전자공학과4),崔창수(24.인하대 기계과4), 동생 顯東씨(25.인하대 경영학과4)등이 그와 함께 이런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온 [대학생 사원]들이다.
趙씨의 손재주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그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가정이 어려워지자 혼자 상경, 충무로에 있는 [삼성전기]라는 전파사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전자기술자로 성장하였다. 대학을 나온 전문적인 기술자가 되고 싶어 전파사를 그만두고 독학을 한 趙씨는 고입검정고시에 합격, 용문고를 졸업했고, 재학 중에도 중-고교교사들과 친척들의 TV를 수리해주고 받은 수고비로 학비를 댔다. 78년 인하대전자공학과에 들어간 후에는 고장 난 학교의 실험용방사능측정기와 1만분의 1초까지 측정가능한 시계오차량 측정기도 혼자 거뜬히 수리해 내는 등 [컴퓨터해결사]로 통했다. 오는 22일 인하대를 졸업하는 그의 올해 계획은 퍼스널컴퓨터끼리의 통신교환 소프트웨어와 최소가격으로 식품, 사료들을 생산할 수 있는 원료배합비율 및 성분량 산출 프로그램개발 등 수없이 많다. 회사도 확장, 직원 수도 곧 45명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金民培기자] 2003. 1. 30
그 흔한 벤처투자를 창업 후 14년 만에 받다.많은 벤처기업은 창업초기에는 주변의 지인들에게서 엔젤투자를 받거나 개인이 확보할 수 있는 자금으로 연구개발비용을 충당하고, 초기제품이 나오면 기관투자를 받아서 본격적인 생산과 시장개척을 하여 회사다운 회사가 된다. 더 큰 규모의 매출과 이익, 새로운 시장 개척을 하기위하여 대출보다는 자금시장에서 직접 조달받기 위하여 코스닥이나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창업 초기에 투자를 한 엔젤투자자나 기관투자자들이 주식을 팔아서 작게는 몇 배에서 몇 십 배의 차액을 가지게 된다.
기관투자를 Venture Capital이라고 한다. Venture Capital 에는 아무리 직역이나 의역을 해도 ‘창업투자’라는 뜻이 없다. 그러나 벤처캐피털 업계는 ‘제일창업투자’, ‘일신창업투자’ 등으로 ‘창업’이라는 단어를 가진 회사이름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벤처 캐피털이 투자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한국은 1986년에 이 법을 만들면서 새로운 금융업이 탄생되는 것을 우려하여 창업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기업에게만 투자하도록 규정한 창업법으로 베처캐피털을 설립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창업기업에만 투자하는 규정의 소멸로 인하여, 다양한 이름으로 회사이름을 짓고 있다. 심지어 사체업체까지도 ‘xx캐피털’이라고 회사이름을 지어도 특별한 규제가 없다.
86년에 만들어진 이 법이 처음에는 3년 이내로 한정을 지었었다. 83년에 창업한 비트는 초기부터 투자받을 의지도 작았지만, 몇 달 상관으로 이 3년이 경과하는 바람에 창업초기에 투자를 받지를 못하여 다소의 어려움이 있었다. 나중에 5년과 7년으로 늘려준 적이 있었으나, 그 때마다 비트는 이 기간 지나버렸기에 투자를 받을 수가 없었다. 벤처 1호로 알려진 비트는 관련법보다 앞서서 창업을 하였기에 격을 수 있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이다. 만약에 83년이 아니라 한 해 늦은 84년에 창업을 했더라면 회사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커져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비슷한 시기인 85년에 창업된 (주)메디슨은 초기부터 기관 투자를 받아서 빠른 시간에 성공을 크게 이루기도 했다. 물론 메디슨은 다른 이유로 2002년에 법정관리중이긴 하다.
벌어서 투자를 한다.
캐피털회사로부터 투자받아서 성장을 추구할 수가 없었으므로 처음부터 수익모델을 확실히 할 밖에 없었으며, 그 해의 반짝 소득뿐만 아니라 다음해의 확실한 수익을 위해서 미리미리 R&D를 재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투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1996년에 벤처기업의 지원을 위한 관련법의 개정을 담당한 산자부의 홍기두과장에게 당시까지도 7년으로 규정되어 있던 것을 14년으로 늘리자는 제안을 하여, 법을 고치고 제일창업투자사로부터 처음으로 투자를 받게 되었다. 96년은 비트가 창업 14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96년의 벤처캐피털회사들은 벤처를 평가하는 잣대를 정확히 가지고 있지를 않았으며 투자 실적이 미미하며, 일부는 주유소에까지 투자하기도 했다. 벤처를 모르는 벤처캐피털회사들이 구성된 인프라에서는 벤처가 꽃을 피울 수가 없었다. 미래가치와 기술평가를 할 수 있는 투자 모델을 만들기 위하여 시장을 잘 아는 10여명의 벤처기업가들이 자금을 모아서 ‘무한기술투자’사를 설립하기까지 하였다. 무한기술이 투자배율과 투자금액을 정해 놓으면 다른 창투회사가 뒤 따라서 투자하는 사례가 생겼으며, 이 것이 자연스런 학습의 기회가 되었다. 비트는 당시에 투자이익보다는 사회적인 인프라구축에 기여한다는 무한기술투자에 5억원을 투자하였었으며, 무한은 코스닥에 등록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벤처기업들이 사업초기부터 무조건 기관투자를 통하여 손쉽게 투자받은 몇 십억 또는 몇 백 억원의 돈으로 고급자동차부터 바꾸고, 사무실은 고급 인테리어로 꾸미고, 에지니어들에의 실력을 검정도 하기 전에 높은 연봉을 제시해서 스카우트하고, 고급술집을 전전하면서 흥청망청 써버리는 사례를 많이 봐왔다. 투자 받은 돈은 결코 노력에 의해 번 돈과는 다르기 때문에 주주들에게 충분한 이익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이나 기업은 필요이상의 자금이 쌓여 있으면 나태해지거나 딴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2003. 1. 30
비트교육센터 설립
89년에 들어서 기업의 자금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해에 1억원 정도는 사회에 환원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전년도인 88서울올림픽때 성화봉송프로그램 개발비 4000여 만원을 사회에 환원하듯 자원봉사했던 것에 대한 고무된 생각도 있었다.
80년대 말까지 프로그래머들의 90% 이상이 COBOL이라는 랭귀지를 사용하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었다. 본인의 판단은 COBOL로는 기업의 경영관리업무 이외에는 이용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국가의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해왔다. 시스템프로그램 개발이 가능한 ‘C’ 랭귀지가 대중화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당시에는 ‘C‘랭귀지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전문가는 삼성전자, 삼보컴퓨터 프린터사업부, 서울대 박사과정, KAIST박사과정, QNIX 등등 모두 30명에 불과 하였으며, 대학에서 정규과목에 있었으나 현업에서 이용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89년 1월의 월스트리트지의 기사를 계기로 고교때부터 목표했던 ‘30세 얼굴 책임’을 달성되었다고 판단한 것은 개인이 똑똑하고 노력하면 판사, 의사, 교수와 같은 평생을 보장받는 전문가로서의 입신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40세에 책임질 얼굴은 조직”이라고 판단하고 새로운 10년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사회환원, 소프트웨어 강국만들기, 40세를 위한 조직, 이 세 가지를 목표하여 비트교육센터를 89년부터 기획을 하여 90년 8월에 설립하였다.
2000년 8월에는 COEX의 ASEM 홀에서 1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정보통신부 안병엽장관, 중소기업청 한준호청장, SW협회 김광호회장, 벤처협회 장흥순회장 등이 참석을 했다. 이때 평가된 내용으로 설명하면, 사회 환원을 위하여 단순한 기부가 아닌 국가에 엘리트를 키워주는 것이 큰 환원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10년 동안 7년을 적자를 보면서까지 상위 1%의 전문가만을 양성해왔다. 절대평가로 선발하다보니 항상 정원미달상태였으며, 이미 상당한 능력의 전공자들을 선발하여 전문가로 키워내고,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6개월 반 동안 교육을 하여 IT업계에서 가장 신뢰하는 비트출신을 만든 것이다. 이들은 평생 취업기준으로 지금까지 100% 취업을 하고 있다. 또한 기술환원을 위하여 ‘비트프로젝트’ 시리즈를 94년부터 매월 1권씩 프로그램 소스코드까지 첨부하여 큰 서점에 공개를 하고 있다.
비록 한 개인과 기업이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소프트웨어 강국 만들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으며, 적어도 “자기가 속한 산업에 기여 없이 돈만 번다면 장돌뱅이일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설립을 했지만, 초기의 수료생들은 ‘C‘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회사가 없는 관계로 C전문가가 COBOL회사에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요와 공급을 고려하고,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COBOL교육으로 바꾸었어야 했으나, 고집스런 신념으로 임하여 수지는 맞지 않았지만 ’C’교육만을 했다. 2002년 현재 한국에는 COBOL프로그래머가 100명 미만이지만, 일본은 전체 프로그래머의 40%가 COBOL을 사용하고 있다.
분명 비트교육센터는 한국의 IT강국이 되기까지 큰 기여를 한 샘이다. 당시 KAIST 박사과정 손덕진, 서울대 박사과정 황기태(現,한성대교수), 백선욱(現,상명대교수)씨 등이 아주 열정적으로 동참해 주었다.
10주년 기념식 당일 3920명의 총 비트출신 중에서 이날 참석자가 1400명이었다. 본인이 다녔던 대학 동문 10만명의 총 동창회에는 보통 800명 정도(일부는 부부동반)가 모이는 것에 비하여 상당한 결속력을 가진 조직이 되었다. 수료식행사는 ‘수료식’이 아닌 ‘비트출신 입단식’으로 바꿔서 행사를 하고 있다. 2002.10.15
부족한 실력으로 열심히 일하면 회사와 국가를 망하게 한다.“
기존의 아날로그방식 또는 오프라인 기업의 경영방법과는 확연히 다른 지식중심의 기업에서 느끼는 직원들의 평가방법과 인재관리에 대한 표현을 나는 1990년에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부족한 실력으로 열심히 일하면 회사와 국가를 망하게 한다.” 당시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 진행주이었으며, 심지어 쓰레기수거를 알리는 차량에도 새마을 노래를 틀어주던 시기였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열심히 일해 잘 살아보자고 할 때 전혀 다른 뜻의 주장이 된 것이다. 심지어 1998년 2월 방송된 MBC의 ‘성공시대’프로에서도 이 내용이 그대로 방송이 되어 충격을 주기도 했다.
제조업에서 능력이 떨어지는 직원이 잘 만드는 직원에 비하여 생산량의 차이가 있다면, 보수를 그 만큼만 적게 주면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은 생산된 수량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판매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중심 기업을 대표하는 소프트웨어개발회사의 두 직원의 경우를 살펴보면, A라는 직원은 하루에 1000라인의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B라는 직원은 하루에 10000라인의 프로그램을 작성했다면, B라는 직원은 10배나 많은 작업량을 이루려면, 점시시간을 줄이고, 퇴근시간을 넘겨 오버타임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휴일에도 열심히 근무를 해야만 해야 될 것이다. 오프라인 기업은 이 직원의 성실성에 대단히 만족하고 그에 따른 오버타임이나 휴일근무 수당까지 지급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그램소스코드에 접근을 해보면 object개념이나 모듈을 이용해서 코딩을 해도 될 일을 지식이나 정보가 짧아서 시간을 낭비하는 사례가 더러 있다. 개발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프로그램을 작성했다면, B라는 직원은 헛일을 한 것이다. 하루에 끝나는 프로젝트는 없다. 최소한 서너 달이 경과하다 보면 10만 라인이면 될 일을 100만 라인으로 프로그램 작성을 했다면 하드웨어의 규모가 10배가 좋아야 하던가, 같은 규모의 하드웨어 기종이라면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기능향상이나 bug라고 하는 문제가 발생되면 문제 처리를 위해서는 10배의 노력이 아니라 10의 자승배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결국은 이 프로그램은 판매될 수가 없다. 판매하면 판매기업 뿐만 아니라 공급받는 사용자에게까지 엄청난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B직원은 몇 달 동안은 아무런 역할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회사나 고객에게 엄청난 시간낭비를 시켰으므로 국부를 저해시키기도 했다. 이 직원은 보수를 주지 않던가, 엄청난 벌을 줘야한다.
부족한 실력으로 사회에 진출하던가, 회사에서 배우겠다는 배짱으로는 준비 없이 사회에 진출하는 대학졸업생은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 비트교육센터를 만들게 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정보산업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낮은 실력이 그 기업을 어렵게 하고, 산업까지 어렵게 하는 점이 안타까워 시작되었다.
“지금의 청년실업은 일시적이 아닌 디지털시대의 전주곡이다.”-2001′
2001년부터 시작된 청년실업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매우 장기적이 될 것이다. 2003. 1. 7
IMF때 아나바다운동을 거부하다.
97년 11월의 IMF사태는 애국심을 더욱 키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공대출신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평소에 IMF라는 기구가 있다는 상식조차 없었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에서는 IMF와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보도되어 충분한 학습을 할 수 있었다.
가정이 살수 있는 방법, 기업이 살 수 있는 방법, 국가의 최종파산이 되지 않기 위한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심지어 발빠른 민간 기구에서는 금모으기 운동을 하여 외화를 갚아보겠다는 발상에 이르렀다. 망해 가는 조국을 위해 청년 기업가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했다.
우선, 박수화 비서를 시켜 스탠드형 태극기를 구입하여 사장실에 세워 두었다. 그리곤 매일 아침 출근과 함께 태극기를 바라보던가 만지면서 그 날 그 날의 각오를 다졌다.
언론과 정부에서는 기업이 살기 위하여 인건비를 낮추고, 직원을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을 시켜서 구조조정을 해야 하며, 설비투자를 줄이던가 설비를 팔아서 현금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 격층제 세우기, 형광등 격등제 켜기, 격월 근무제 등을 해서라도 비용을 줄여야 하며, 국민들은 아나바다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기업이 살기 위하여 직원들이 실업자가 되어도 고통을 서로 나누자고 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전략을 펴는 것이 아니라 부분이 살기 위하여 전체를 죽이는 우를 범하고 있어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체가 좋아야 부분도 좋다. 97년에 하이테크정보지가 준 ‘하이테크 어워드’의 상패에 붙어 있는 10돈 짜리 금 덩어리와 집에 있던 얘기들 돌 반지는 금모으기운동본부에 제공을 하였으나 그 나머지 모든 방안을 반대로 했다. 그때부터 회사의 모든 엘리베이터는 격층제도 아닌 “빨리 문닫고 꿈을 키우러가자”라고 스티커를 붙혀서 오히려 문을 빨리 닫게 하고, 실내등은 항상 밝게 하고, 심지어 보수를 같은 해 두 차례나 인상을 시켜 반년봉제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모든 회사가 임금을 삭감하고 있을 때 직원들에게 우리는 오히려 인상하겠다고 하였으나 믿으려하지 않기에 징검다리격으로 반년만에 보수를 인상하여 회사를 믿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비트는 지금도 반년마다 년봉이 인상되는 반년봉제로 보수를 책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직원의 10%가 넘는 14명의 새로운 직원도 채용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비트는 직원들의 사기가 높아져 IMF속에서도 매출이 늘어나고 흑자까지 이뤄내어 강남역 사거리에 있는 3000평 규모의 본사 사옥을 마련하게 발판을 만들었다.
간혹 전체를 위하면 개인은 손해라고 한다. 당장은 손해로 보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이 지나면 부분의 효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국가의 21세기 비젼을 위하여 95년 말에 창립한 벤처기업협회를 만든 주역들은 각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산업의 새로운 축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2001년 2002년 세간에 오르내린 벤처게이트들의 주인공들은 이런 모임이나 산업발전을 위한 활동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개인만 살겠다고 노력한 이들 때문에 벤처산업 전체의 가치를 엄청나게 떨어트려 놓았다. 자기 기업만 살겠다고 자기가 속하여 있 는 산업의 발전에는 기여하는 바가 없는 ‘장돌뱅이’같은 기업가 되지 말아야 한다. 2002.10.15
98년 제야에 보신각종을 치다.
법학을 전공하신 강부시장님에게 벤처라는 개념과 신경제의 축이 될 벤처산업의 이해를 시켜드리는 역할부터 협회의 서울시 담당을 내가 맡게 되었다. 강부시장님의 첫 질문이 “벤처기업의 수익률이 높다고 하던데, 그 것은 폭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신기술이나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지식형의 기업들이 고수익일 수밖에 없으며, 벤처기업이 그런 이익을 내기 위하여 고학력의 인재들이 밤낮없이 노력을 한 결과라고 설득을 하고, 또한 이런 기업들은 공해가 전혀 없는 지식을 이용한 기업이므로 수도 서울에 집중시키도록 유인할 필요가 있으며, 은행과 벤처캐피털회사등의 지원기관들이 한 곳에 모여서 이 들의 시너지를 높여야 된다는 것이 우리가 서울시에 주는 정책제안이었다. 결국, 강부시장께서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학여울역 가까운 곳에 4700여평이 시유지가 비어있으니 이 곳을 활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가 벤처직접시설을 건립 지원할 수 있는 관련법이 없다하여, 97년 7월에 통과시킨 [벤처기업육성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관련법을 삽입을 했다. 결국, 이 부지를 첨단산업용지로 시의회에서 용도변경을 통과시켜서 3만평의 서울벤처플라자를 건립하기로 하고, 서울도시개발공사에서 설계공모까지 마쳤다.
그러나 97년 11월의 IMF로 인하여 이 계획은 큰 변화를 가졌다. 새로 당선된 고건 신임 시장이 벤처직접시설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새롭게 건립을 할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빌딩을 통째로 임대하여 활용하자고 하여, 역삼역 인근에 있는 아주빌딩을 서울산업재단이 임대하여 중소벤처기업들이 입주하여 저마다 꿈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벤처빌딩 설계공모와 아주빌딩의 선정위원으로 역할을 했다. 이 때 서울시 산업국과 시정개발연구원의 관계자들에게 신경제의 새로운 동맥이 벤처가 될 것이라고 인식을 시켰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자들은 인프라 구축에 앞장을 썼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99년부터 확산된 벤처기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현정학술장학재단 설립
자기이름을 붙인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봉사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단순히 학비만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을 도와 주고 싶었다. 일본의 마스시다 정경숙처럼 사람을 키우는 재단을 만들어 국가와 사회에 크게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을 발굴하고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매년 장학생을 선발해서 1년씩 장학금을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선발되면 몇 년씩 계속 지원을 해주고, 이 들을 기회 있을 때마다 교육을 시키겠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95년 말부터 벤처협회를 만들고 산업을 주도한 창업가들은 선배 경영인들과는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스톡옵션(96년 벤처협회가 설립된 후에 법을 만든 것임)과 같은 제도를 도입하여 기업의 가치를 직원들과 공유하고, 재산이나 기업을 자식에 물리려 하지 않고, 사회봉사와 나눔을 잘 하는 신인종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이런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2000년 1월 3일에 재단을 설립하기로 발표를 했다. 그 후에 미래에셋, 메디슨 등의 재단설립, 장흥순사장의 모교 체육관 건립, 정문술회장님의 300억 KAIST 기부 등이 발표되기 시작하여 벤처 나눔의 사례가 계속되고 있다.
재단에 기부되는 자금은 개인 재산이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기업의 재산은 주주, 직원, 고객들의 것이다. 주주는 배당을, 직원들은 보너스를, 고객은 적적한 거래금액을 원하지 큰 금액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마침 2000년 초 비트컴퓨터의 유상증자를 위해 99년 말에 주식을 처분해서 확보된 자금 중에서 20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금연을 약속하면 장학금 준다.
생활이 어려운 학생을 뽑는다는 조건이 아니라 금연을 약속해야만 하는 선발조건이다. 어렸을 때 세운 순수한 자기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 내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과 청소년시기에 인격형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설득하고 가르치고 싶었다. 무엇을 어떻게 약속을 했는지는 일일이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제대로 된 약속이라면 어른들이 못하게 하는 담배에 대해서 금연을 약속했을 것이고, 최소한 이것부터 지켜내려는 의지를 가진 학생이면 우리의 선발 대상인 것이다. 또한 선발되기만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가려는 것이다.
대학생보다는 등록금이 싼 고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교 1학년까지 4년 동안 지원을 하려 했으나, 1학년 신입생을 선생님들이 좋은 학생이라고 판단하고 추천을 한다는 것은 형식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2학년초에 추천을 받고 대학교 2학년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각 학교에서는 생활이 다소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성적 우수하고, 약속을 잘 지킬 학생을 추천을 해주어 매년 20명씩 새로 선발되어 매년 80명씩 지원을 받게 된다. 장학금으로만 매년 1억 7천만원이 지출되고 있다.
이공계 대학교수님들에게는 각종 연구자금으로 연구활동을 할 수 있으나, 인문사회계통과 경상대학교수님들은 그러하지 못하다고 한다. 외부에서 연구비를 500만원만 받게 되어도 파티를 한다고 할 정도이다. 이들 인문사회/경상계 교수님의 연구비지원을 위하여 매일경제신문사와 함께 ‘매경비트학술상’을 만들어 교수님 해마다 세분을 선발하여 매년 3000만원을 지급하고, 비트컴퓨터의 주 사업분야인 의료정보학회에 매년 ‘비트학술상’으로 1000만원씩 지급하여 총 학술비로만 400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2000년 초에 하나은행의 상품 중에서 년 9.7%의 금리로 장기 예금을 해둔 이자로 재원을 마련하였으나, 지속적인 금리를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부동산을 취득하여 임대소득으로 재원을 확보 할 예정이다. 재단의 수익사업을 통해 얻은 소득의 70%만 목적 사업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관리비로 사용해도 되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재단은 전액 목적 사업에만 사용되고있으며 관련된 모든 이들은 자원봉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2002.10.15
남한사람 최초의 북한 인민대학습당에서 강의 2000년 여름에 85년부터 친분이 있는 재미교포 한 분이 찾아오셨다.선교차 북한에 갔다가 IT교육과 의료정보분야에 전문가를 추천해 달라고 해서 조사장을 추천해놓고 왔으며, 원하면 북한의 초청장을 받아낼 테니 가서 컨설팅을 해달라는 말씀이었다. |
못 할 것도 없다고 했더니, 10월 24일에 입북하는 초청장과 평양을 왕복하는 고려민항의 비행기표가 10월 초에 도착했다. 그때의 심정은 약간의 두려움과 막연한 기대, 해야될 역할, 초청을 한 다른 의도, 뿐만 아니라 비트의 연말실적이 더 중요한 시기여서 방북을 포기하였다. 그러다가 60명의 북한 IT전문가를 대상으로 강의를 바란다는 재요청이 있어서, 1월 말에 입북하기로 정하고서 새로운 비행기표를 받고서 입북절차를 밟게되었다.
입북예정 한 주일 전에 김정일위원장이 중국 상하이의 푸둥지역에 가서, IT에 대한 충격과 큰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국내외의 뉴스에 크게 다뤄진 직후에 남쪽의 IT전문가가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뉴스는 KBS, MBC, SBS 뿐만 아니라 전 언론에 다뤄졌고, 그후, 1월 30일에 북한에 도착하였다.
누구나 간다는 김일성장군상이나 생가방문 없이 작은 초대소로 안내 되었다. 그곳에서 저녁과 반주를 곁들이며 저녁 9시까지 거의 6시간여를 남쪽의 IT와 벤처, 비트컴퓨터에 대해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설명을 한 것이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에 그 날 하기로 된 강의가 하루 연기가 되어, 2월 1일 인민대학습당이라는 곳에서 전문가 500명 대상으로 확대해서 강연을 하도록 위원장의 허락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종합대학 내에 대강당이 있을 터인데,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교육하고 학습하는 곳에 남쪽의 사람이 몇 십 명도 아닌 500명의 대중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게 한 것부터가 파격적이었다. 오수용 전자공업성상(한국의 장관급)이 직접한 말로는 “역사적인 일이다. 조총련계 인사조차 인민대학습당에서는 강의한 적이 없으며,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는 더더욱 없다”라며 남쪽의 자본주의자가 강의를 하게된 것에 대한 신뢰의 무게를 하였다. 더욱 신뢰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사전에 강의내용을 점검하지 않았으며, 단지 영어를 자제하고 체제비판은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결론은 첫 날 저녁의 대화가 매우 중요한 신뢰를 주었다고 판단이 된다.
당일 날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동안 강의한 주된 내용은 우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성장과정과 비트컴퓨터의 업적, 사회 활동을 약 1시간동안 설명하고, 한국 IT의 여러 지표를 보여주면서 발전된 IT산업의 규모를 1시간 설명하고 중간 10분 동안 쉰 후, IT가 변화시킨 각종의 사회현상과 최근 동향의 소프트웨어 개발방법론을 약 2시간에 걸쳐서 설명을 했다. 참석된 이는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대학, 조선컴퓨터센터, 평양정보센터, 약전연구소(한국의 전자통신연구소), 과학원, 수학연구소등의 교수들과 책임연구원들이 구성되어 있었다. 약 20%즘 여성이었고, 나이는 3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IT설명에 영어는 빠질 수 없기에 말은 하고 필요에 따라 설명을 곁들 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비디오 촬영을 했으며, 나중에 당 간부들이 돌려 봤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진지할 뿐만 아니라 북한의 문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IT는 과학이 아닌 시장이다. 따라서 시장을 만들고, 시장에서 원하는 것을 만들어 가야 발전한다.” 강성대국을 만들기 위한 과학혁명을 오래 전부터 추진 해왔다는 것에 대한 반박을 했다. 지금도 그들은 열심히 뭔가를 개발하고 있으나, 상품성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2002.10.15
For example, the Baby – Phat vendor permits you to add money to the card in a number
of different methods from tax refund to bank transfer.
It’s best to make thoughtful decisions than just to acquire something special in the interest of it.
For those who do not like fruit cake there exists chocolate, mud cake, caramel, vanilla, cheesecakes, ice cream and even cakes which has a variation of flavours in lay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