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之林之 – 암기식 학습의 뿌리

*** 이글은 CNS 시사법률신문 2004. 7. 27.자(제86호) 12면에 실린 임영호 선생의 칼럼이다 ***

法之林之그 첫 번째 원고
[暗記式學習의 뿌리] 1)
한림법학원 林榮虎
10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는 불볕더위는 TOEIC과 학점취득요건에 이어서 Law School 도입문제로 어수선한 考試街를무자비하게 달구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어수선함이 이미 17년 전의 뜨거웠던 여름에 배종대 선생님이 『우리나라법학에 대한 반성과 전망』2)에서 진단하고 제기했던 문제와 대안들을 무시했던 우리의 業報라는 점을 어쩔 수 없이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 여름에 흘리는 땀이 진땀인지 식은땀인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고필자는 판단한다. 이번 호에서는 먼저, 그러한 業報중에서도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의 考試를 비롯한 모든 시험영역에서유일한 대안으로 당연시되는 이른바 ?찍기식 암기형 학습?의 뿌리를, 위의 배종대 선생님의 논문을 다시 읽으면서, 잠시스케치해보기로 한다.
1875년의 ‘운요오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규를 기점으로, ‘조선의 法의 개혁’이라는 美名하에자행된, 아직도 오늘날 우리의 교과서에서 ‘근대 서구법의 계수’라는 황홀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日帝의 식민통치수단으로서의 반민주적인 법의 강요와 극소수 친일기득권층의 법학독점의 보호를 통한 자생적 법문화 가능성의 발본색원은,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한 日帝의 만주군관학교 同門으로 구성된 박정희 일당과 그 후계자들에 의한 반민주적인 폭압적 군사깡패정권의 후원을 거치면서3), 우리법학을 일본법학의 노예법학으로 자리잡게 하는 데에 거의 완벽하게 성공하였다.그에 따라, “해방 후 우리나라는 우리의 언어?풍습?가치관에 터잡은 입법을 도외시한” 채, ‘舊法’4)인 일본법을 ‘가나(かな)’로 된 토씨만 우리말로 바꾸어 제정하고, 그에 관한 법학과 법개념까지 한 세트로 직수입?표절하였다5). 그런데, 일본의 법률용어와 법개념은, ‘메이지 維新’ 당시의 계몽적 학자6)들이 서양의 法文化자체를 열등한 것으로 깔보았던 일본의지성인들을 속여서 서양법문화를 어마어마한 것으로 과장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중국고전의 어려운 文語的표현을 차용하여 번역한 것들이었다7).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은 해방 후의 법학도들은 “교과서를 도배질한 일본식의 법개념?법이론을 이해에 앞서서 달달외는 도리 밖에 없었다. 따라서 법학은 이해학문이 아닌 암기학문이 되었고, 그리고 그것은 국가고시를 패스하여 판?검사라는 ‘영감’이 되기 위한 첩경이기도 했다”. “우리 법학계의 ‘표절’의 수입선은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어느 정도 다변화하”여 독일 등의 서양법학과 법개념이 수입되었으나, 역시 그 번역어는 일본법학의 번역어를 모방하거나 비슷한 한문 문어투의 번역이 고수되어 법학도와 고시생의 수험현실에는 별 변화가 없게 되었다. 결국,우리의 법학도와 고시생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이어서 여전히 ‘四書三經’류의 중국고전을 일본인이 改作한 단편적인 개념으로 분해하여 뜻도 모르는 채 아무런 통계학적 근거도 없는 ‘Lotto’식 찍기에 의존하여 암기하고 있을 뿐이다.
단순암기에 내용의 탐구가 필요할 리 만무하고, 내용의 탐구가 필요없는 데 大學과 專攻이 존재가치를 유지할 리 만무하다. 오직 합격인원의 증가에 따른 기득권수호방안으로 미봉책인 진입장벽들 만이 정치적 홍보효과와 야합하여 난무할뿐이다. TOEIC은 미국 장사치의 배만 불리고, 학점취득요건은 대학교육파탄의 확인사살이며, 섣부른 Law School의 도입은, 아마도, 법학 자체의 붕괴?소멸을 초래하여 이론없는 실무라는 괴물단지를 창조하게 되고, 결국, 우리는 正義가없는 技術에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내팽개치게 될 것이다.
문제의 올바른 해결책은 進入의 통제가 아니라 暗記의 통제가 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이해는 암기보다 몇 배나 쉽고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암기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어마어마한 효능과 실력의 풍요를 가져온다. 이에 관한 진솔한 스케치는 다음 호에 실리는 것이 약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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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가 곽윤직시리즈를 고집하며 속칭 ‘신림9동 고시촌’의 고시학원에서 민법강의라는 것을 시작한 지도 어언 6년여가 흘러가고 있다. 고시생의 기품있는 벗으로 자리잡은 .시사법률신문.에서 이번 호부터 귀한 칼럼란 한 귀퉁이를 부족한 필자에게 나누어 주기로 하였기에, 그 동안의 강의와관련하여 평소에 느꼈던 점들과 수강생들에게 못다했던 이야기들을, 고시생들이 반드시 읽었어야 하지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소중한 내용들과 함께,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나누어 보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감히 拙筆亂書를 올리기로 한다.
2) .현상과 인식.(1987. 8.), 90쪽 이하. 이하에서 인용부호로 인용한 인용문은 본 논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3) 해방 후 대학 강단에 섰던 헌법학 제1세대는 대부분 식민지 시대의 日帝의 하급관료 출신이었고(우선, 국순옥, .자본주의와 헌법., 까치, ‘편역자 서문’ 참조), 그들 중의 일부가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어 상납하고, 당시에 東獨에만 있던 惡法인 ‘교수재임용법’을 수입하여 그에 저항한 수많은 동료학자들을 숙청하여 강단에서 쫓아낸 사실은 公知의 사실들이다.
4) 어쩌면, 이러한 용어 자체가 우리의 현행법질서가 식민지시대의 법질서의 일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지도 모른다.
5) 이는 지금도 별 차이가 없는 현상이다. 예컨대, 양창수 교수가 .민법연구[제1권].에서, “우리 民法學의 수준에 대한 참담한 自己告白”(351쪽)이라고했던 1983년의 가등기담보등에관한법률이, “.., 규정의 배열이나 체제, 심지어는 조문수도 완전히 일치하고 있”(304쪽)어서, 곽윤직 선생님으로부터 .“거의 완전한 모사”.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일본의 가등기담보계약에관한법률을 거의 그대로 무단복제하였다는 사실은, 해방 후 30년이 지나도 일본의 사실상의 식민치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6) 대표적 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우리가 법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인 .權利.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에 관하여는, 우선,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남상영.사사가와 고이치 옮김, .학문의 권장., 小花, 13, 228쪽 참조. 이 책은 제자인 정준모 변호사가 바쁜시간을 쪼개어 필자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 고마움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것은 선생인 나의 자랑스러운 권리일 것이다)을 아는 법학도가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를 자문자답해보면, 거짓과 기만으로 inferiority complex를 감추려는 우리 학문의 저급하고 비열한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그에 비한다면, computer software의 무단복제는 오히려 철없는 아이들의 지엽말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7) 철학용어의 사정에 관하여는, 김용옥, .철학의 사회성., 세계의 문학[1985. 여름], 133쪽

출처 : http://www.yhlimn.com/

야간 빗길 고속도로 교통사고 때

야간 빗길 고속도로 교통사고 때
추돌한 뒷차보다 안전표지 안한 정차차량 책임 더 크다
정성윤 기자 jung@lawtimes.co.kr

비오는 저녁 고속도로에서 과속차량이 안전표지 없이 도로에 정차중인 차를 들이받아 사고가 난 경우 정차 중인 차량 운전자의 책임이 더 커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민사3부(주심 邊在承 대법관)는 전국화물자동차운송사업연합회가 대한화재(주)를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소송 상고심(2003다68505)에서 지난달 22일 이같이 판시, 원고일부패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회사 공제계약에 가입한 송모씨가 고속도로에서 전방주시의무를 태만히 한 채 다소 과속운전한 과실이 있더라도 피고회사 보험가입자인 최모씨가 야간 빗길을 운전하다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후 사고차량 표지를 하거나 비상점멸표시등을 켜는 등의 별다른 조치없이 2차로에 정차한 과실보다는 결코 크지 않다”며 “따라서 송씨와 최씨의 과실비율을 6대 4로 인정해 과실상계한 것은 현저히 불합리하다”고 밝혔다.

원고는 지난 99년2월 공제계약 가입자 송모씨가 트럭을 과속운전하다 충북진천 부근 중부고속도로에서 안전표지를 하지 않은 채 2차로에 정차중이던 피고회사 보험가입자 최모씨가 운전하던 아반떼 승용차를 뒤늦게 발견하고 급제동하는 바람에 뒤따라오던 트럭이 들이받아 운전자 박모씨가 사망하자 박씨 유족들에게 9천3백여만원을 지급한 뒤 피고를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소송을 냈었다. 원고는 1심에서 최씨의 과실이 70%로 인정돼 6천8백여만원의 일부승소판결을 받았으나, 2심 법원이 최씨의 과실을 40%로 제한하고 구상금으로 3천9백여만원만 인정하자 상고했었다.

대법관 인사 여론에 흔들려서는 안돼

“대법관 인사 여론에 흔들려서는 안돼”
 
현직 법원장, 대법관 제청 과정 문제점 지적하고 사표
 
정성윤 기자 jung@lawtimes.co.kr
 

신임 대법관 임명제청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현직 법원장이 사표를 제출하는 등 신임 대법관 인사로 인한 후유증이 일고 있다.현직 법원장의 사퇴는 내년 崔鍾泳 대법원장과 邊在承 대법관 등 대법관 4명이 물러나는데 이어 2006년에도 姜信旭 대법관 등 6명이 퇴임하는 등 모두 11명의 대법관 교체를 앞두고 사법부 독립의 근간인 대법관 인사가 법원 외부의 영향에 의해 흔들리고 있지않느냐는 법조계의 우려와 이에대한 경계를 나타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姜秉燮 서울중앙지법원장(사시 12회)은 지난달 28일 “헌법이 부여한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은 철저하게 보호돼야 하는데도 일부 시민단체들의 의견이 대법관 인사의 기준이 된다면 이는 대법원장의 고유권한에 대한 명백한 침해”라며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했다.

姜법원장은 또 “재판의 독립은 과거에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었지만 이제는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이라며 “문제가 있다면 언론이 따끔하게 지적하되 다른 법관들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다.

姜 원장은 최근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한 판결 경향과 관련해서도 “법관은 진보여서도, 보수여서도 안되며 백지상태에서 판단해야 한다”며 “혹시라도 진보적 시민단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결이 기우는 경향이 있다면 법원 판결의 공정성이 위기를 맞을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 최종영대법원장이 金英蘭 대전고법 부장판사(사시 20회)를 신임 대법관 후보로 제청한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며 30년 가까이 공직생활을 해와 이제 후배들을 위해 길을 터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초의 여성 사법시험수석합격자이며 첫 여성 법원장인 李玲愛 춘천지법원장(사시 13회)도 대법관 임명제청 이후인 26일 대법원에 사표를 제출했다.

신임 대법관 임명과 관련한 이같은 후유증에 대해 서울의 한 판사는 “사법부 역시 시대적 요구를 무시할 수 없지만 개혁이 절대적 가치가 돼버리면서 묵묵히 일해 온 많은 법관들은 혼란스러운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다른 판사는 “30년 가까이 성실히 근무해 온 분들이 사퇴를 해 안타깝지만 대법관 구성에 사회적 다양성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 포함돼야 한다는 사회 여론을 반영한 이번 대법관 인사에 큰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姜 원장과 李 원장이 사표를 냄에따라 이르면 다음주 중으로 법원장급에 대한 후속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법원장 인사를 앞두고 또 다른 법원장급의 추가 사퇴가 있을 지도 주목되고 있다.

2005년 2월

邊在承

2005년 9월

崔鍾泳

2005년 10월

柳志潭

尹載植

李勇雨

2006년 7월

裵淇源

姜信旭

李揆弘

李康國

孫智烈

朴在允

제44회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 인터뷰 & 합격기 – 안미령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安 美 伶
1981년 11. 6. 生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대 3년 재학
제44회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
考試界 2003/1
考試界 2003/1
Ⅰ. 감사의 말
우선 오늘의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립니다. 그동안 저의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애쓰신 어머님과 동생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기 일처럼 함께 기뻐해 준 귀한 친구들에게도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기도해주시고 축하해주신 소중한 친척 분들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이렇게 합격의 기쁨을 누릴수 있게 된 것은 저의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더 정진하라는 뜻으로 알고 앞으로 주어지는 일에 더욱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글재주가 없는 저의 이 두서 없는 글이 수험생 여러분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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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사법시험 수석합격 인터뷰 & 합격기 -차진석

최선을 다한 수험생활

車 鎭 碩 (차진석)
·1976년 1월 10일 生
·울산 학성고등학교 졸업(1994)
·경희대학교 법대 4년 재학중(2004)
·제45회 사법시험 수석합격(57.64점)

Ⅰ. 2년의 삶
1. 어려운 나날들
1998년.. 군대를 제대하면서 집안의 가세를 기울었다. 당장 밥먹을 걱정을 해야했고, 제대의 기쁨을 누리기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집안에 보탬에 되어야 했다. 99년이 되어 2학년에 복학을 하면서 힘들게 학교생활을 하였다. 수원의 친구집에서 회기동까지 2시간이 되는 거리를 매일 통학하는 것이 가장 큰 곤욕이었다. 하루에 4시간 가량을 지하철에서 그리고 40여분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그 당시 나에겐 정말 불행이었다. 그러던 중 결국 울산에 있는 집을 팔게 되었고, 경주의 외지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느 정도 빚이 청산되었을까? 생활에 조금씩 안정이 찾아오길 시작하였고, 학교 앞(회기동)에 조그마한 방을 한 칸 얻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고 형이 대기업에 취업하면서 부모님은 조금 더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던 일이 생겼다. 갑자기 장 천공이 생겨서 응급실에 실려 가게 된 것이었다. 2001년 봄이었다. 수술을 받고 난 후 경주로 내려와 집에서 쉬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 사법고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아버지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여 주었지만 어머니는 반대를 하셨다. 몸도 많이 나약해져있고, 잘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를 상정하면 아니 생각해 보기도 싫으시다는 것이었다. 결국 어머니를 설득한 후 수술을 핑계로 1년 휴학을 하였고, 2001년 6월 1일에 신림동 고시원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Continue reading “제45회 사법시험 수석합격 인터뷰 & 합격기 -차진석”

로스쿨 도입시기 ’10년 이후’

정원은 교육부가 대법원 등과 협의 후 결정사항

현재 법조계 및 전국 법과대학의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는 새로운 법조인 양성 및 선발제도가 최근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에서 논의가 활발히 되고 있는 가운데, 대세를 이루고 있는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될 경우, 입학정원은 1,000여명 안팎이 될 가능성이 높고 도입시기는 201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실은 28일 열린우리당 법사위와의 로스쿨 관련 간담회에 제출한 ‘법조인 양성제도 개선시안’에서 “전국 로스쿨의 총 입학정원은 현재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기준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간지에서 보도된 1,200여명 안팎의 인원에 대해 사법정책연구실의 한 관계자는 “명확하게 인원이 제시된 바는 없다”며 “다만 현재 선발인원인 1,000명이 기준이 되어야 되지 않겠나 라는 입장이었을 뿐”임을 지적했다.
위 관계자는 “로스쿨의 구체적 정원책정 등은 교육의 주관부서인 교육인적자원부가 주무부서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라는 입장과 함께 “대법원은 다만 입학정원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할 뿐”이라고 전했다.
또 현재 수험생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만큼 로스쿨이 도입될 경우 언제부터 시행될 예정인지의 질문에 대해서는 “법조인 선발문제는 최소한 10년 많게는 100년 대계를 바라봐야 하는 사안”이라면서 “현재 수험생, 대학재학생 등에게 충분한 과도기적 유예기간이 주어질 수 있도록 제안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날 시안은 또 설립기준을 충족하고 인가를 받은 대학에 한하여 로스쿨을 설립하도록 하되, 교육부 산하에 정부, 법조인, 법학교수 등으로 구성되는 법학교육위원회를 설치해 인가권을 부여하자는 제안과 전임교수 중 20% 이상은 전공분야 경력 5년 이상의 실무경험 보유자로 하되, 법관과 검사를 로스쿨 교원으로 파견하자는 방안도 제시됐다.
한편, 로스쿨 관련 논의는 오는 8월 16일에 개최되는 사법개혁위원회 제18차 회의에서 보다 구체화될 예정이다.

한국고시/ 취재부

법학도의 3가지 유형

법학도의 3가지 유형
독일의 법학자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1878~1949)는 법학을 공부하러 대학에 오는 젊은이들을 관찰해보면 대체로 3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첫째 부류는 학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남들이 법을 공부하면 결코 손해는 안된다고 말하는 바람에 지망해 온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로마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법언 “유스티니아누스가 명예를 준다”(Dat Justinianus Honored!)는 유혹에 끌려 ‘빵을 위한 학문’으로 법학을 선택한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별로 기대할 바가 못 되며, 이들이 설령 법률가가 된다 하더라도 국민 생활에 손해를 주면 주었지 이익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두 번째 타입은 지식만 발달하고 인격성이 부족한 젊은이다.
이들은 대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을 나타낸 우등생들로서 부모의 권유에 따라 법과에 대한 선악을 가리지 않고 법과가 좋다고 하니까, 당연히 들어온 자들이다.
법학도가 된 그들은 실제적인 흥미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냉정하고 논리적인 성격 때문에 우수한 성적을 유지한다.
이들은 법학자가 되든 법률실무자가 되든 대체로 유능하다는 평을 듣는다.
법률의 과제가 매우 형식적이고 별다른 창조성을 요구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이들을 가리켜 전형적인 법률가라 하여도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라드부르흐에 의하면 우리가 주목해야할 세 번째 타입이 있다.
그들은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철학, 예술, 혹은 사회와 인도주의에 기울어지면서도, 외부적인 사정 때문에 부득이 법학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이다.
예를 들면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저술가나 학자와 같은 불안정한 生路를 선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예술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창작활동에 뛰어들 수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당분간 법학을 선택하면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시간과 정력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그 틈을 이용하여 자기의 본래의 취미방면에 정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법학에 대해 고민을 깊이 하고, 때로는 도중에 포기하고 마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끝까지 법학을 공부하고 나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법학자와 법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종고 저, 법헉통론 p 2~3, 1988, 박영사)

근대법사상가열전 6 – 구스타프 라드브루흐

라트브루흐 [Radbruch, Gustav Lambert, 1878.11.21~1949.11.23]

독일의 법철학자.

국적 독일
활동분야 법철학
출생지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州) 뤼베크
주요저서 《법철학 요강》(1914∼1950)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州) 뤼베크 출생. 뮌헨 ·라이프치히 ·베를린의 각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1903년부터 하이델베르크대학 강사로서 형법 ·법철학을 강의하고, 쾨니히스베르크대학 ·킬대학의 교수를 거쳐 192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일생을 보냈다. 신(新)칸트주의의 입장에서 존재와 당위(當爲)를 구별하고, 궁극적 가치판단에 대하여서는 인식이 아니라 귀의(歸依)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으며, 상이한 세계관에 대한 관용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사회민주당 내각의 사법장관으로서 형법 초안을 기초하였고, 히틀러 정권 때에는 자유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강단에서 쫓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치상대주의를 수정하였는가의 여부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으나, 자연법적 경향을 띠었을 뿐, 자연법으로 전향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대표적 저서로는 《법철학 요강 Grundzuge der Rechtsphilosophie》(1914∼1950)이 있다.

근대법사상가열전 5 –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

사비니 [Savigny, Friedrich Karl von, 1779.2.21~1861.10.25]
독일의 법학자.

국적 독일
활동분야 법학
출생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주요저서 《현대 로마법체계》(1840∼1849)

역사법학파(歷史法學派)의 창시자.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출생. 괴팅겐대학과 마르부르크대학에서 공부하고, 1808년에 란츠후트대학 교수, 1810년 베를린대학 창립과 함께 그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어 초대 학장이 되었고, 1842년에는 프로이센 사법상에 취임하여 1848년까지 일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학문연구에 전념하다가 83세로 베를린에서 죽었다. 그는 그 당시의 제1급 로마니스트로서 19세기 전반의 독일 법학계를 지도한 역사법학파의 대표자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A.티보가 국민적 통일을 위하여 통일법전 편찬을 강조하자 그는 1814년에 《입법 및 법률학에 대한 현대의 사명에 대하여》라는 소책자를 발표하여 독일의 입법에 있어서 정책적 이유 때문에 국민의 법적 확신을 무시하여 법전편찬을 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즉, 그는 법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민족과 함께 발달하고 민족과 함께 멸망하는 민족정신의 표현이라고 하여 법형성의 주체를 민족정신에 구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로마법을 민족정신의 표현이라 보고 로마법의 역사적 연구를 중요시하여 정확한 개념구성, 정밀한 법원론(法源論), 면밀한 논리구성 등을 가지고 로마법의 새로운 통일적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 법률학의 사명이라고 주장하여 《현대 로마법체계 System des heutigenrmischen Rechts》(8권, 1840∼1849)를 저술하여 독일 민법학(民法學)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또한 국제 사법학(私法學)의 수립에도 공헌하여 그 학설의 영향은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미치게 되었다. 주요저서에 《소유법(所有法) Das Recht des Besitzes》(1803) 《입법 및 법률학에 대한 현대의 사명에 대하여 Vom Beruf unserer Zeit fr Gesetzgebung und Rechtswissenschaft》(1814) 《중세 로마법사 Geschichte des rmischen Rechts im Mittelalter》(6권, 1815∼1831) 등이 있고, 이 외에 《논문집》(5권, 1850) 《채무법(債務法)》(2권, 1851∼1853) 등이 있다.